2021. 2. 26. 18:13ㆍ幢竿支柱와 掛佛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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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具善會, 韓國上代 伽藍建築의 幢竿支柱 및 掛佛臺에 관한 硏究 /영남대 대학원 (석사학위)
1. 당간지주
1)기원
당간지주는 불교 국가중 한국에서 독특한 형태로 나타나는것으로, 불교 도입 이전의 소도,장승 (蘇塗,長丞)사상에서 유래되어 사찰 건립과 동시에 입구 측에 건립되어 온것이다.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 따른 영향)
높이 약 3m가량의 두 당간지주 사이에 높이 약 15m 가량의 당간을 꽂아서 멀리서 볼때 사찰의 위치를 알려주고,경계,상징,벽사(境界,象徵,辟邪)등의 의미로 조성하였으며,당간 꼭대기에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사찰의 깃발을 꽂기도 했다.( 백척간두 [百尺竿頭]의 어원)
고려말 이후 차차 산지로 가람이 이전되고, 당간의 조성 의미도 줄어들면서 점차 잊혀져갔다.
※당간지주 건립이 차차 사라진 가장 중요한 이유
원래 초기 평지 가람에서 당간지주를 세워 높은 당간을 꽂아 깃발을 달던 이유는 그 첫째가 온통 단층 건물 뿐이던 시절에, 가람의 위치를 알려주고, 불보살의 위세를 대중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즉. 현실적으로 저층 위주의 건물뿐이던 당시 도읍지에서 15m 이상이나 되는 높은 당간을 꽂아 금방 누구든지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또, 그 자체가 이미 Landmark의 역활도 충분히 하였을것이다.
하지만, 통일신라 말기를 거치면서 선종이 들어오고, 구릉지가람으로 이행되면서,높은 당간의 시각적인 효과는 평지 가람에 비해 낮아질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더군다나 차차 산지 가람으로 이행되던 시기에는 높은 당간에 달려서 신도들에게 위용을 뽐내던 깃발의 시각적인 효과는 거의 기대할 수가 없게 된것이었다.
즉,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던 모든 구조물은 현대에서나 당시의 통일신라,고려시대 때에도 구조물을 바라다보던 인식은 같을 수 밖에 없는것이다.
그러므로, 통일신라시대 이후 차츰 사찰에서 당간지주 건립과 당간에 깃발을 달던 전통 의식이 사라져간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시각적 효과의 반감, 내지 감소로 인한 당간 조성의 필요성이 없어진것이라 할수 있고,외향적인 형식보다는 개인의 정신 수양 및 내실을 중시하여 산중 불교로 발전한 계기가 된 선종(禪宗)의 발전도 그 배경이 되었다 할 수 있을것이다.
2) 형태
외형은 초기 원시 사상에서 유래된 "남근 숭배 사상( 男根 崇拜 思想 )" 의 영향으로 외형 자체가 바로 남근의 형상을 띄고 있다.
평면상 지주의 장,단변의 길이 비율이 고대에서 주로 사용되던 비례 수치인 1 대 루트 2로 만들어졌고, 당간지주의 단변 길이와 맞은편 지주와 떨어진 거리의 비율 역시 1 대 루트 2의 비례가 적용되었다.
3)가람 공간상의 위치상 특징
평지 가람일때는 대웅전을 중심으로한 가람 주축선과 멀리 떨어져 있고, 두 지주가 향하는 방향도 가람 주축선과 평행하게 건립되었다.(평행 우세)
산지 가람일때는 가람 주축선과 가장 많이 가까이 위치해있고,,두 지주가 향하는 방향도 가람 주축선과 직각을 이루고 있다.(직교 우세)
구릉지 가람일때는 위의 평지와 산지 가람일때의 특징들이 각각 반반씩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당간지주의 이러한 공간적인 특징들은 폐사지일 경우엔 원래의 가람 주축선의 위치와 방향을 유추할수가 있어서,폐사지 발굴작업에 많은 도움을 받을수가 있다.
2. 괘불대
1)기원
신자수가 많을때 대웅전이 비좁아서 조형물 형태의 부처 대신 두루말이 그림 형태의 부처,즉, 괘불을 대웅전 앞 마당에 두개의 깃대를 세워 대웅전 안의 부처를 대신하게 해서 더 많은 신도들이 부처를 볼 수 있게 하였고, 외형은 당간지주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어졌다.(야단법석[野檀法席] 의 어원)
2)형태
당간지주에 비해 장식이 거의 없고, 크기도 소규모로 조성했다,
3)가람 공간 상의 위치에 따른 분류
ㄱ) 괘불용 괘불대-대웅전 앞 마당에 두 쌍으로 조성된다
ㄴ) 소형 깃발용 괘불대-대웅전 축대위에 두쌍으로 조성된다.
(아래 사진은 최초로 조성되었다고 알려진 경주 삼랑사지 당간지주이며, 그 외형이 가장 남근의 형태에 가까운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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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幢竿支柱를 조사,연구한 보고서,논문 등의 연도별 목록 및 개요 >
1916년-松本 文三郞, 朝鮮の幢竿に就いて, 羽田 亨, 內藤博士還曆祝賀支那學論叢, 東京: 弘文堂
1933년-藤島 亥治郞, 慶州を中心とせる新羅時代幢竿支柱論, 史蹟名勝天然紀念物,제8집제11호
1935년-葛城 末治, 朝鮮の幢及び幢竿に就いて , 朝鮮總督府內務部 , 朝鮮金石攷 , 東京 大阪屋號書店
위의 3편의 문건 내용은 당간지주의 구체적인 용도,의미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부족하고, 단순 몰취미한 민족이 만들어낸 이상한 조형물이란 표현도 하고 있다.
1961년-李夏中, 尙州伏龍里幢竿支柱, 考古美術 제2권 제9호 통권14호
1962년-尹容鎭-法水寺址와 遺物, 古文化1집
1965년-李殷昌, 洪城五官里寺址의 幢竿支柱와 石佛坐像, 考古美術, 제6권 제1호 통권 54호
1981년-具善會, 韓國上代 伽藍建築의 幢竿支柱 및 掛佛臺에 관한 硏究 /영남대 대학원 (석사학위)☜ 論文Download
1983년-李浩官, 統一新羅時代幢竿支柱와 石橋(考古美術 158·159)
1985년-朴洪國, 慶州地方 幢竿支柱의 硏究(慶州史學 4, 東國大學校慶州캠퍼스國史學會) ☜ 論文Download
1989년-文化財管理局, 金谷寺三層石塔·洪城東門洞幢竿支柱 修理報告書
-내용은 고고학적인 입장에서 당간지주를 해체 복원한 조사보고서이다.
1991년-鄭永鎬 ,한국의 幢竿과 幢竿支柱 古美術 28('91.3) pp.11-17 한국고미술협회
1996년-嚴基杓,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연구/ 韓國敎員大 大學院 (석사학위)☜ 論文Download
-논문의 결론은 당간지주의 외형과 장식에 따라 약 5종류로 형식상 분류를하여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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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嚴基杓, 忠北 地域 幢竿과 幢竿支柱 考察 /博物館誌 5('96.10) pp.37-68 忠淸專門大學博物館
1997년-國立文化財硏究所, 北韓文化財解說集, Ⅰ : 石造物 篇 ☜ 報告書Download
-간략한 설명과 사진 소개
1997년-嚴基杓 ,統一新羅時代의 幢竿과 幢竿支柱 硏究 / 文化史學 제6·7호 (1997. 6) pp.301-358 韓國文化史學會
1999년-嚴基杓 ,高麗時代 幢竿과 幢竿支柱 / 文化史學 제11·12·13호 (1999. 12) pp.535-589 韓國文化史學會
2000년-金泰中, 경주 문화재 순례 6 : 남간사터 당간지주(南澗寺址 幢竿支柱) /慶州文化 6
2000년-엄기표, 全北 地域의 幢竿과 幢竿支柱 /順天大博物館誌 제2호 (2000. 12) pp.41-79 순천대학교박물관
2001년-具滋奉 , 高靈 池山洞 幢竿支柱의 發掘調査 / 佛敎考古學 제1호 (2001. 12) pp.145-153 威德 大學校博物館
-내용은 고고학적인 입장에서 당간지주를 해체 복원한 조사보고서이다.
2006년-박홍국, 신라 삼간공 관통형 당간지주에 대한 고찰-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論文Download
2007년-엄기표, 한국의 당간과 당간지주 / 학연문화사(단행본)
-전국에 산재된 당간지주의 도록과 개별적인 외형,형식에 대한 설명이 수록된 책자이다.
< 해체 복원된 당간지주의 기록(현재까지 모두 4회) >
1. 용두사지 철당간 (청주) -시기=일제시대-복원도면 남아있음.( 조선고적도보 참조)
2. 1989년-文化財管理局, 金谷寺三層石塔·洪城東門洞幢竿支柱 修理報告書
3. 2001년-具滋奉 , 高靈 池山洞 幢竿支柱의 發掘調査 / 佛敎考古學 제1호 (2001. 12) pp.145-153 威德大學校博物館
4. 만덕사지 당간지주 하부구조 정밀조사-국제신문 2014-06-18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4061800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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